영광 임대섭 이장

임대섭 염산 야월 3리 이장이 야월교회 옆 순교관에서 배길양 목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고사미 주인공인 고봉주씨가 추천한 만당 스님과 정장오 씨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터뷰를 고사함에 따라 임대섭씨의 인터뷰로 이번주 고사미를 이어갑니다.

인생은 새옹지마. 이 말만큼 그의 인생을 표현할 말은 없다.

임대섭(65) 이장은 영광에서도 한참 달려야 도착하는 염산면 야월 출신이다. 염산초를 졸업한 후에는 부모님을 따라 광주에서 생활했다. 20살이 됐을 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혈기가 넘쳤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78학번으로 대학교에 들어간 임 씨는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을 즐기며 학업에 열중했다. 하지만 곧 10.26사건으로 등장한 신군부 세력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혼란에 빠지게됐다.

“무력으로 이뤄낸 정권 교체에 고려대 학생들은 분개하면서 일어났었죠.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계엄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곧 휴교령이 떨어지고 학생운동에 참여한 멤버들에 금교령이 떨어지면서 저는 집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금교령에 따라 더이상 학교에 있을 수 없게된 임 씨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친구와 함께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기관사가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광주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으니 손님들은 송정역에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날은 5월18일 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젊은 임 씨와 친구에게 걱정의 시선을 보냈고 이 사태에 휘말리지 않도록 피신을 권고했다.

겨우 도착한 집에서 지내다 친구를 따라 대산, 전주 등을 오가며 금교령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권이 2번이 바뀌어도 금교령은 그대로였고 금교령이 풀렸을 때 그의 나이는 30줄이 됐다.

“그때만큼 부모님께 죄송한 적이 없었어요. 아들 키워서 학교를 보내 놨는데 졸업도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까... 그게 가장 죄송한 점이죠. 하지만 이제는 두분 다 떠나셔서 더 잘해 드릴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37살,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39살에 염산농협으로 취직하면서 임 씨는 다시 고향에 자리 잡게 됐다.

많은 것을 잃고 고향에 내려와 지내는 동안 허무한 마음에 헤매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교회에 다니게 되며 힘든 마음이 정리가 됐다.

다산다난한 삶을 살아와 웬만한 일에는 끄떡하지 않는 임 씨. 임 씨가 유일하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배길양(82) 목사다. 임 씨와 배 목사는 1988년에 배 목사가 야월교회에 부임하면서 알게 됐다. 배 목사는 야월마을에 온 후 주민들을 위해 온 마음으로 봉사해 참된 지도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특히, 배 목사는 야월에서 희생 됐던 사람들을 위한 순교관을 만드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야월마을에서는 6.25사태가 벌어졌다. 국군과 유엔군이 영광과 함평으로 진입하자 기뻐하는 주민들에게 화가난 공산군들은 마을 주민들을 협박해야월교회 교인들을 모두 알아내 65명을 몰살시켰다.

야월교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공산군들은 교인들을 모아 놓고 석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는 등 한 명의 아이조차 남기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이름 조차 남기지 못하고 희생됐다. 텅 빈 교회와 성도들의 집도 불에 탔다. 오랜 시간동안 교회도, 교인도 없는 마을이 됐다.

야월교회 순교관은 가슴 아픈 야월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곳으로 매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넋을 기리고 있다,

배 목사는 잊혀진 야월 주민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내 줬을 뿐만 아니라, 순교관 건립 이후에도 취약계층을 돌보며 온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다.

임 씨는 “배 목사 이후로 그런 분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며 지금도 가끔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있다.

“사랑으로 봉사하는 마음과 희생정신을 알려주신 배길양 목사님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언제나 건강히 지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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