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독립운동가 이강복 선생 외손자 장금배씨]
기삼연 의진 투신, 이강복 의병
11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
외손자 장 씨, 농민 위해 앞장서

독립운동가 이강복 선생의 외손자인 장금배(80)씨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외할아버지인 이강복씨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표했다.

“독립을 위해 의병으로 활동하신 이강복 선생의 후손으로서, 독립유공자 유가족으로 불리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말년에 외할아버지 덕분에 복 받는 것 같습니다.”

의병 이강복 선생의 후손들은 현재 모두 세상을 떠나 유일한 외손자로 남은 장금배씨(80)씨는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선정됐었던 날을 회상하며 미소지었다.

이강복 선생은 명문가인 전주이씨 효령대군 정효공파 후손으로 을사늑약(1905) 이후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것에 분개해 굳은 결심으로 1907년 담양 기삼연(奇三衍) 의진에 투신해 같은 해 음력 12월27일 금성산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 순국했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의병 토벌 기록인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1913)’에서 처절했던 전투의 기록을 발견했으며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1952) 등에서 공적을 확인, ‘전주이씨 효령대군 정효공파세보’(1957)에서 순국 사실을 발견하며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다.

장 씨는 이강복씨의 유일한 외손자이지만 평생을 독립유공자의 후손임을 모르고 살아왔다.

다만 가족들 사이에 흘려들은 이야기로 외 할아버지께서 추운 겨울에 전쟁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후 눈으로 덮이는 바람에 몇 달 동안이나 찾기가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너무 어릴 때라 정확히 외할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외할아버지께서 명예롭게 돌아가셨지만 이후 외가댁은 많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죠. 원래 대대로 양반 집안이라 농사일이나 험한 일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가세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온몸으로 헌신했던 독립투사였지만 그의 가족들은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일본에 의해 변화된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장 씨도 마찬가지였다. 영광에서 자본을 끌어와 농사를 지으며 수많은 고비를 견뎌냈다. 80여 년이 지날 때까지 고인이었던 외할아버지에 대해 잊고 살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이 힘들어 정리할 무렵 교육자로 일하고 있는 조카인 흥규가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아보게 됐습니다. 간간히 내려오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과 외가에 남아있던 서적과 내력들을 살펴보게 되면서 의병으로 활동하신 것을 정확히 알게 됐고 아는 학자 권유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수 있었습니다.”

장 씨는 독립유공자의 유족으로 인정받은 후 故 이강배 선생이 묻힌 거창에 찾아가 업적을 기렸으며 명절마다 찾아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다.

장 씨는 “삶에 바빠 가족의 일에 무지한 채로 살아온 세월에 가슴이 아프다”며 업적을 모른 채 떠나간 다른 가족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편 장 씨 또한 외할아버지의 추진력을 물려받아 영광에 살며 좋은 일에 앞장 섰다. 특히 현재 장 씨의 고향 마을이 된 월평리 한옥마을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장 씨는 한국의 전통적인 집 형태인 한옥을 살리기 위해 한옥을 짓는 건축가 지인의 도움과 영광군의 도움을 얻어 한옥마을을 형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장 씨는 농사일 당시 농민들이 수매의 어려움을 겪을 때 앞장서서 해결하기 위해 총대를 메기도 했다.

“한때 땅콩 유행에 따라 농사를 지었는데 많은 농가가 수매할 곳을 찾지 못해 주저앉았었어요. 하지만 다 같이 살아보자는 결심을 하고 영광, 고창에 있는 땅콩을 다 수매해서 정부에서 도와줄 수 있도록 담판을 지었는데 다행히 해결이 참 잘됐었죠. 그런 일들을 떠올려보면 제가 외할아버지 피를 물려받았나 싶기도 합니다. (웃음)”

장 씨는 외할아버지인 이강복 선생을 기억하며 “할아버지 덕에 제가 명예를 얻어 자랑하러 다니는 게 제 낙이 되었다”며 “당신께 정말 감사하고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사진은 기삼연 의진이 기록된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1913)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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