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새벽 별빛 삼아 오르막 오르던 곧올재 길 그립구나.아들 딸, 복음에 맡기고 이제 주의 품에 쉬려네.’

평생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묘비에 기록한 한줄 시다.

어머님 생전에 곧올재를 오르던 길은 새벽이나 늦은 밤이 많았다.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못하셨기에 어머니는 노점상을 하시며, 가장의 역할을 도맡으셨다.

이른 새벽 고동이 가득 담긴 고무 다라이를 이고 장사를 하러 다니셨던 길이 곧올재 길이다.

새벽녘에 나가시면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고동을 잡으러 가는 길은 고행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백수, 염산으로 많이 갔었는데 버스를 타고 신작로에 내려서 염전이 있는 바닷가를 하루 종일 헤매다 보면 해가 넘어가고, 가져간 비료포대 가득 채워진 고동을 메고 다시 신작로로 나오는 길은 여간 고된 게 아니었다.

고동을 팔고, 옥수수를 팔고, 과일을 팔고, 고구마도 팔고, 번데기도 팔았다. 명절이라도 다가오면 명절 대목을 보내기위해 과일박스를 산더미처럼 쌓아야 했다.

박스를 구입하고 방앗간에서 멧재(왕겨)를 대량으로 구입한 후 박스에 멧재를 채우고 과일을 담아 과일선물상자를 만들었다.

사월 초파일에는 불갑사 한쪽 구석에 포장을 크게 펴고 전을 만들고 심부름을 하며 어머니 따라 장사를 다녔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 했던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더 파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런던에서 평화롭게 삶을 보내고 있고, 딸 앤이 가끔 찾아온다.

나이가 들어 기억들이 뒤섞이는 복잡한 현실을 경험한다. 딸이 집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딸의 남자 친구가 물건을 훔친다고 불평을 쏟아 낸다.

급기야 딸이 집에 들어오는데, 딸에게 앤을 찾는다고 말한다.

제가 딸 앤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홉킨스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슬픔에 잠긴다.

병원 복도에 서있는 안소니 홉킨스가 보이는 걸 보면 병원에 입원하는 과정이 얼마나 슬프게 전개됐을지 모르겠다. 딸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에 슬픔과 고통이 수반되는 눈물을 멈출 수 없다.

어머니는 1년 6개월 전에 대동맥류로 큰 수술을 받으셨다. 전남대 응급실로 이동하는데 의사 선생님은 이동 중에, 또 수술 전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가야 된다고 말했었다.

긴 수술을 마쳤다. 수술시간이 길수록 뇌에 산소공급이 원활치 않기 때문에 건강이 좋지 못할 거라는 설명이 있었다.

수술 후 회복하셨지만 어머니를 뵐 때마다 “내가 누구예요” 라고 물어야 했다.

“큰 아들 정훈이”

그래도 어머니는 자식들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했고, 감사하게도 손주들의 이름도 기억했다.

광주 큰아들 집에 며칠이라도 머물면

“영광 가자”

“짐을 챙겨 놔라. 아침에 영광 갈 때 나 좀 데려다 주라”

어머니는 그렇게 광주에서 며칠을 못 머물고 영광을 찾곤 했다.

해년마다 겨울이면 일본에 온천을 다녀오곤 했다. 온천을 여행하다 사진을 찍는데 어머니께서 “사진을 한 장 찍자” 하시며 “영정사진으로 쓸 수 있게 찍자”며 렌즈를 바라보시는데 눈빛에 여러 감정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잘 지내야 된다” 는 당부부터 한 평생 삶에서 알았던 인연들에게 건네는 미소의 인사까지, 어머니는 그렇게 영정 사진을 일본 온천에서 찍으셨다.

어머니 장례에 그 때 촬영했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사용했다.

지난해 학정리에 선영을 조성했다.

어머니는 선영을 보시며 좋아하셨고, “수고했다” 칭찬 하셨던 그곳을 쉼터로 삼으셨다.

평생을 동반자로 살면서 삶의 지혜를 몸소 알려주셨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모든 기운을 다 넘기고, 기억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서둘러 가셨다.

마지막까지 자식들과 손주들이 함께 했다.

어머니의 삶을 한줄 시로 묘비에 새겨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밤하늘 새벽 별빛 삼아 오르막 오르던 곧올재 길 그립구나.아들 딸, 복음에 맡기고 이제 주의 품에 쉬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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