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로 - <아프리카, 좋으니까>
송태진 케냐 방송국 GBS 제작팀장

45. 용서하되 잊지 말라

100일 동안 인구의 10%에 달하는 80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이었다.

한 마을에서 함께 농사를 짓고 음식을 나누어 먹던 이웃들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돌연 서로를 죽였다.

끔찍한 비극이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이웃을 죽여야 했다. 총과 폭탄은 물론 칼, 몽둥이, 도끼, 낫, 돌 등 상대를 죽일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손에 들고 싸워야 했다.

폭도들은 이성을 잃었고 약탈과 폭력, 강간, 유아 학살 등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온 나라가 학살의 광기에 휩쓸렸다.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국제 사회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주둔하고 있던 평화유지군마저 철수시킬 정도였다.

결국 투치족 난민 출신 반군이 정체를 장악하며 100일간의 비극은 일단락되었다. 보복을 두려워한 200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 난민이 콩고민주공화국과 부룬디 등 인근 국가로 피난을 떠났다.

2000년 발표된 르완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생존자의 99%가 폭력 현장을 목격했고, 전 국민의 79.6%가 가족을 잃었으며, 69.5%가 학살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식민시대 벨기에가 조장한 종족 갈등이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참극을 낳은 것이다.

르완다 인종학살은 돈 치들 주연의 영화<호텔 르완다>를 비롯해 영상물과 문학 등으로 그 참상이 널리 알려졌다.

새 정권은 종족 간의 화합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언제까지 대학살의 후유증에 사로잡혀있을 수 없었다.

‘용서하되 잊지 말라’라는 구호를 앞세워 르완다 내전 기간 일어난 광범위한 범죄들을 소상히 기록해 공개했으며 학살에 관여한 폭도들은 수용소에서 노역을 하며 죗값을 치르게 했다.

종족 구분은 없어졌고 후투와 투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행여 눈치 없는 외국인이 당신은 어떤 종족이냐고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저는 르완다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종족을 기준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차별을 가하는 건 르완다에서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매년 4월이 되면 르완다 전국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줏빛 리본으로 물든다.

하지만 딱 그 기간에만 추모 분위기에 잠길 뿐, 평소에는 학살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슬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게 하려는 암묵적 배려다. 르완다 국민들은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우리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