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로 - <아프리카, 좋으니까>
송태진 케냐 방송국 GBS 제작팀장

44. 식민정책이 조장한 종족 갈등

아프리카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르완다는 탄자니아와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커다란 국가들 사이에 끼어있다.

경상남북도를 합한 크기와 비슷한 이 조그만 나라가 겪는 고통의 역사는 식민지배가 아프리카에 입힌 상처를 생생히 알려준다.

독일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웃나라 부룬디와 함께 벨기에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이때 벨기에는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비열한 수를 꺼낸다. 인위적으로 종족간의 갈등을 조장한 것이다.

르완다의 인구는 14%의 투치족과 85%의 후투족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투치는 주로 목축을, 후투는 농경을 했으며 외모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서로 동화되어 살았기에 종족의 구분은 사실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벨기에는 법으로 두 종족을 구분했다.

소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코의 길이가 길거나 짧거나 하는 비상식적인 기준에 따라 식민지의 모든 주민들을 후투 혹은 투치로 나누었다. 본래 이들 종족은 특별한 원한이 없었고 우호적인 사이였다.

하지만 벨기에는 종족간의 갈등을 일으키기 위해 소수 종족인 투치에게만 고등교육의 기회와 공무원 자리를 주어 다수 종족인 후투를 지배하도록 했다. 후투 사람들은 한 순간에 열등한 계층으로 전락해버렸다.

불공정한 대우를 받게 된 후투족은 투치족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이러한 분열은 그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식민통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벨기에의 조직적인 이간질로 친구였던 둘은 지독한 원수가 돼버렸다.

시대가 변하고 1962년, 르완다와 부룬디는 각각 독립했다. 지배자 벨기에는 떠났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종족간의 앙금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후투족은 그동안 특권을 누린 투치족을 끌어내리고 신생국 르완다를 장악했다. 권력을 차지한 후 후투 정권은 식민지배 기간 투치에게 쌓였던 원한을 거침없이 발산했다.

우혈충돌, 쿠데타, 학살이 빈번히 일어났다. 평범한 민간인들이 단지 투치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박멸해야 할 바퀴벌레’라고 불리며 목숨을 위협받았다.

수십만 명의 투치 난민이 고향을 떠나 이웃나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투치족은 반군 세력을 조직해 후투족에 저항했다. 두 종족 사이의 증오와 복수는 점점 더 크게 자라났다.

갈등이 반복되던 1994년 4월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이 평화협정을 진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암살당했다.

그가 탄 비행기가 격추된 것이다. 분노한 후투 극단주의자들은 투치 반군이 대통령을 살해했다며 애먼 투치족 주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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