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로 - <아프리카, 좋으니까>
송태진 케냐 방송국 GBS 제작팀장

37. 자유를 위한 케냐인들의 희생

고토를 되찾길 바랐던 15만 명의 케냐인들이 폭력과 고문, 성범죄가 횡행한 반인륜적 수용소에 갇혀 고통을 겪었다. 분노한 마우마우 단원들은 비밀을 발설한 배신자들을 찾아 복수했다.

복수를 당한 사람들은 도리어 영국을 지지하며 민병대를 조직해 마우마우와 대적했다. 백인편에 선 자들과 마우마우 편에 선 자들이 서로 갈라져 학살과 복수를 거듭하는 비극이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누명이 겹치며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케냐를 뒤흔들었던 마우마우 운동은 영국의 무자비한 진압과 내부 분열로 힘을 잃으며 처절하게 마감되고 말았다.

마우마우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케냐인, 특히 키쿠유 부족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백인은 고작 32명이 죽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마우마우가 영국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마우마우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하인으로 살아가던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의 본래 모습에 눈을 돌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서양 도둑의 종으로 사는 것을 거부한 케냐인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길 꿈꿨다. 그들은 무기를 들었고 싸움을 했다.

이것은 불가능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싸웠다. 그리고 종이 아닌 주인으로 죽었다. 영국인들은 그들을 더 구속할 수 없었다.

마우마우의 봉기가 진압되고 3년 후 1963년, 케냐는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얻었다.

마우마우 운동을 진압하며 영국은 잔혹한 민낯을 세계에 드러냈고 지탄을 받았다.

아프리카 식민지배 정책을 재고하며 여러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얻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 케냐인들은 마우마우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서 활동한 마우마우 전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케냐인은 이싸카 나 위야씨’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마우마우 운동은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한지를 케냐인들에게 알려준 커다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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