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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도…” 의로운 죽음 택한 이강복 선생

우리 고장 독립유공자 [영광]
후지 이강복 선생

2020년 05월 28일(목) 20:41
후지 이강복 선생의 외손자인 장근배씨가 지난 18일 영광읍 자신의 자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들고 있다.
광주지방보훈청이 제101주년 3·1절을 맞아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 후지 이강복 선생을 비롯해 20명의 독립유공자에게 포상을 전수했다.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후지 선생이 영광군 홍농읍 출신으로 알려지며 나라를 위해 앞장선 그의 생애와 희생에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편집자주


명문 양반가, 영광 출신 이강복 선생
을사늑약으로 국권 빼앗기게 되자
성제 기삼연 선생 이끄는 의병 합류해
3차례 전투 참전해 담양 전투 중 순국

선친 독립운동 공적 재조명하고자
후손 이흥규씨, 2년간 자료 수집결과
호남삼강록, 전남폭도사 등 공적 확인
3·1절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돼

후지 선생 부인 나채봉씨, 남편 잃고
일제 억압, 핍박 견뎌내며 살아와
후손들, 공적 기리는 비 세우고파


일제에 맞서 목숨을 바친 후지 이강복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담양에서 의병에 참여해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한 후지(後芝) 이강복(李康福; 1860. 12. 23~ 1907. 12. 27) 선생은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 단지 마을 출신이다.

정부는 지난 3월1일 제101주년 3·1절을 맞아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애국장은 외손자인 장근배(영광읍 거주)씨에게 전달됐다.

후지 선생은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후예이며 을사늑약(1905)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천성이 강개한 후지 선생은 섬 오랑캐의 침략에 대한 분기가 날마다 가슴 속에서 끓어올랐다.

호남삼강록 충의편 4쪽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후지 선생은 당시 “무릇 백성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도 사가에 드러누워 괴로워만 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연히 일어나 평소에 사귀던 성제 기삼연 선생(奇三衍, 1962년 독립장)이 이끄는 의병에 합류해 수차례 왜적을 무찔러 승리했으나 1907년 12월27일(음력) 담양 추월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했다.
<전남폭도사>(1913)에 기재된 이강복 선생의 공적

일제의 의병토벌 기록인 이른바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1913) 조차 “거괴 기삼연이 이끄는 4백의 비도(匪徒)가 담양군 용문 성문리(금성산성 소재)를 점령하고 곧 담양을 습격하려고 함에 주재소 순사가 광주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순창수비대와 협력해서 기선을 제압, 즉각 성문리에서 적을 공격해 궤란시켰다. 적의 사망자 23, 부상자 30, 노획물은 화승총 5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전투가 얼마나 처절한 항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포상은<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1952) 등에서 공적내용이 파악되고 족보<전주이씨 효령대군 정효공파세보>(1957)에서 순국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후지 선생은 양반 명문가 출신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례다.


일평생 선비로 살다 을사늑약 맞선 의병돼다

“일평생 선비로만 살아오셨던 후지 이강복 선생께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빼앗기게 된 계기로 나라를 위해 의병활동을 하며 싸우시다가 전사하셨지요.”

후지 이강복 선생이 이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기까지 그의 증손자인 이흥규씨가 약 2년간의 동분서주하며 어렵게 자료를 수집한 끝에 이뤄졌다.

이 씨는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후지 선생의 이야기를 계기로 가문 족보와 호남삼강록, 영광향교 군지 등을 통해 후지 선생의 기록을 찾게 됐다. 이후 선친의 독립운동 공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국가보훈청에 후지 이강복 선생을 서훈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나라를 위해 싸우신 분들은 수없이 많으나 기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해요. 우리 할아버지(후지 선생)를 따라 의병에 나선 분들이 50명이나 된다고 해요.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많은데 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죠.”

이 씨는 후지 이강복 선생이 향년 47세 되던 해 전사하기 전까지 2개월의 짧은 기간 활동했으나 고창 흥덕 전투, 무장전투 그리고 담양 추월산 전투까지 참전했다고 설명했다. 후지 선생을 따라 나섰던 사람들도 추월산 전투에서 모두 전멸한 것으로 전해졌다.

후지 선생의 시신은 아들인 이완재씨가 약 20일 후 찾아가니 추운 겨울 날씨로 인해 시신이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고 한다. 이에 아들 이 씨가 후지 선생의 시신을 찾아 영광군 홍농읍에 고이 모셨다.


맏아들도 의병에 나서…지역 독립유공자 위한 관심 필요

“후지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부인 되신 나채봉씨가 어렵게 사셨어요. 아무래도 남편이 의병이었으니 일제의 억압과 핍박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남은 가족이 있으니 어려움을 견뎌내며 살아오셨죠.”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폐지됐던 그 시절, 후지 선생은 의병으로 나서기 전 자신의 자택에서 일하던 노비들에게 집안 재산이었던 토지를 다 나눠줬다고 한다.

남편을 잃고 가세가 기울면서 홀로 자식들을 키워왔던 나 씨는 1946년 12월19일 생을 마감했다.

“후지 선생 슬하에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은 일찍이 죽고 첫째인 이완재도 아버지를 모시고 나서 의병활동을 했었어요. 20세 젊은 나이로 의병으로 들어가 7개의 전투에 참가했는데 마지막 고창 무장전투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어 평생 불구자로 살았어요.”

이 씨와 외손자인 장근배 씨는 후손으로써 후지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광 지역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신 유공자분들이 많아요. 이분들을 위한 흔적이 지역에 마련되기 위해서 지역에서도 함께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기자이름 민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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