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키나파소 시골 코나에서 필자와 아이들이 함께 흙집을 짓고 있다. 아래 사진은 1년 동안 같이 생활했던 (오른쪽부터)필립, 우스만, 바텐이라는 친구들이다.

우리 속담에 ‘동물원 원숭이 보듯’ 이라는 말이 있다.

깔본다는 의미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본다’는 뜻이 더 정확할 듯 싶다.

가나에 도착해서 든 첫인상이 바로 그 속담이었다. 수 백명의 어린이ㆍ어른 할것 없이 달려나와 반겨줬다.

딱히 놀이문화가 없는 그들 앞에 ‘듣도 보도 못한’ 피부색이 다른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받은 문화적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필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만국 공통어 ‘바디 랭귀지’, 세계 어디를 가도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적’ 이 아닌 ‘친구’임을 말해주는 것 아니던가.

가나에서 며칠 교육을 받고 그들의 전송을 받으며 다시 부르키나파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흙먼지 날리는 길을 24시간 동안 달린 뒤 마침내 부르키나파소의 수도 와가두구에 도착했다.

‘부르키나파소’라는 국가 이름이 낯선 독자들이 많을 것이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980년대 초 국가명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 이전 국가명은 ‘오트볼타’였다.

파김치 된 몸을 이끌고 짐가방을 들고 내렸다. 하늘도 구름도 나무도 장성 땅과 비슷했다.

다른 건 사우나 같은 후끈한 날씨와 TV나 책에서만 봤던 60년대 시골집들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 뿐. 타임머신을 타고 50여 년 전으로 날아온 듯했다.

부르키나파소의 수도 와가두구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1년동안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보살펴 드릴게요.”

대답이 없다. 대신 와글와글 하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어금니까지 다 보일 정도로 웃는다.

어찌나 천진난만 하던지. 낯선 타국임을 잠시 잊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차 올랐다. 이런 순수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1년의 자원봉사는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도 잠깐이었다. 현실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진씨, 이리 와보세요. 여기가 은진씨가 1년간 지낼 방이예요.”

당황했다. 현지인의 말을 듣고 몇번이나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방이 아니라 화장실같았다. 타일 몇 장 붙인 바닥에 달랑 매트 한장이 깔려 있다.

집도 황토로 담처럼 쌓아 올린 뒤 대충 비만 피할 수 있게 슬레이트 하나 올려 놓은 형태다.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아, 이런데서도 사람이 잠을 잘 수 있다니”

무서움과 적막감, 긴 한숨을 쉬다보니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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