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읍 유탕3리 서동마을

위치 및 환경

읍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6km 가량 떨어진 유탕계곡 안쪽에 위치한 산골 마을로 상동, 가남정, 서동, 운동 네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태산 북쪽 기슭 해발 130~150m에 자리잡고 있다.

유탕저수지엣 700m 가령 안쪽으로 들어가면 운동마을과 상동마을이, 상동 동쪽 250m거리에 가남정이, 가남정 동쪽 300m 거리에 서동마으이 위치하고 있다.

서동 남쪽에 있는 하청고랑의 정이등, 란심이골, 연의골, 뿔찌등 크고 작은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상동 뒷골인 신저골 물과 합수

하여 유탕저수지로 흐른다.

현재 상동마을 앞까지 하루 3차례 군내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나 눈이 조금만 내려도 결행되어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마을 앞 불태산이 그린벨트로 묶여 불편한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유탕제가 장성읍의 상수도원이 되면서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까지 묶여 삶의 제약도 많이 받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유래

구전에 신라시대부터 많은 절이 있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하청사, 상청사, 취봉사, 연화사, 인얼사등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나오는 서굴리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읍동면조에 상동리와 서굴 리가 기록 되어 있다.

1948년 1월12일경 여순사건이후 숨어지내던 지리산 부대원들이 나옹암에 비밀리에 기거하면서 장성경찰서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인들이 새벽녘에 출동해 교전을 별여 나옹암에 거주하던 보살 1명과 빨치산 11명, 군인 1명이 사망했다.

6.25가 발발하면서 유탕마을과 성산등지로 피난을 나가 3년가량 출입경작을 하다가 40여호가 다시 마을로 되돌아 왔다.

1970년경까지 산저골에서 돌을 채취해 방장, 도구통, 학독을 제작해 읍내와 광주등지에 팔아 소득을 올리다가 수요가 없어 중단했으며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21호의 작은 마을이 되었다.

유물,유적

하청사지유탕리 산 157번지 서골마을 밭 가운데 주춧돌과 석축기단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언제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으로는 김시습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에 하청사가 나타나 있다.

그후의 기록으로는 자운선사가 하청사에 머물면서 옛 모습으로 복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주춧돌은 모두 13개로 이주 가로38cm 세로33cm 높이26cm 의 각을 없앤 방형 주춧돌은 정교하게 치석이 되어 있다.

나머지는 남북-동서 장축의 건물 주초석으로 방변길이 50cm× 20cm의 막돌을 이용하여 막돌허튼층 쌓기 기법에 의해 구축된 석추기단이 남아 있는데 고2m 길이 10cm정도 이다.

기타 사지 주변에는 와당편 및 백자편이 수습되며 담장의 유구가 남아 있다.

유탕리 마애불

불태산 주봉의 북편 8부 능선에 위치하고 니머리 북쪽 나옹암터 뒤 석벽에 있다.

본래 이곳에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나옹암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 나옹화상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나옹암 뒤편 암벽에 조각한 것이라 전언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나옹화상이 이곳을 떠나면서 손가락으로 자기의 화상을 그리고 “이 화상이 없어지면 내가 없으며 다시 나타나면 내가 다시 태어난줄 알아라”고 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서향을 하고 있는 이 마애불은 거대한 암벽을 이용하여 음각한 입상이다.

현재는 석태가 끼어 자세히 알수는 없으나 전체적인 상호는 비만형이며 다른부분에 비해 머리부분이 깊게 음각되어 있으며 초생달 같은 눈에 형식화된 코와 입을 음각하고 귀는 목부분까지 길게 느려 뜨려져 있다.

머리부분은 소발로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데 다른부분에 비해 깊게 음가되어 있다. 그 외면으로는 두광을 조식하였고 목에는 삼도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급경사의 계곡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2단의 기단석축이 남아 있고 정리된 마애불 주변에는 기와편이 산재하여 나옹암지임을 추정케 한다.

용소

용추, 하청용추라고 하는데 서동 중간 뜸 동편에 있고 양쪽에 문처럼 큰돌이 높이 서 있는데 삼청동구 넉자가 새겨져 있다.

그 곳 소 안에 살던 용이 그 사이로 빠져 나갔다고 한다.

전설

절안골에 팔만구 암자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절이 많았는데 사찰에서 공양때가 되어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며 쌀뜨물이 유탕마을 구등천 앞까지 흘렀다고 한다.

나옹화상이 산세를 보고 명당자리를 ‘나옹결록’에 적어 두었다고 하며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불속으로 사라지면서 “내가 살아있는 나옹암 뒤 바위에 음각된 마애불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마애불 형상이 남아 있는 것은 나옹화상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동마을사람들

지난 5일 새벽에 내린 비로 서동마을은 멀리 뒤로 보이는 불태산 위로 안개가 끼어 마치 능선으로 폭포가 내리는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서동마을은 30여가구 50여명이 거주하는 마을로 유탕저수지를 지나 마을 표지석을 촬영후 바로 마을회관을 찾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한분도 계시지 않았다.

마침, 회관앞 약초를 채취하는 김형주(67세)를 만났다.

아랫마을인 유탕이 고향인 그는 이곳 서동마을에 자리를 잡은지 11년째로 산에서 약초를 채취하는 산사나이로 수도 없이 산을 오르내린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의 행방을 물으니 마을에 사람이 돌아가셔서 오늘이 삼우제로 상주가 마을 분들을 모시고 식사대접 하러 가셨다고 한다.

대신 김씨에게 서동마을의 유물과 유적등에 전해 들었는데 하청사지는 현재 대나무 숲에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유탕리 마애불에 대해서도 들었다. 비가와서 오늘은 올라가기 힘들꺼란다.

유탕리 마애불 역시 지금은 너무 희미해져 흔적만 남았다고 하면서 서동마을 뿐 아니라 여러마을에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유물·유적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지만 관리소홀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장성읍 주민자치센터는 ‘2015 주민자치센터 담당공무원 및 주민자치위원 워크숍’에서 군에서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옐로우시티 장성’이라는 테마로 주민들과 함께 꽃밭 조성과 벽화 그리기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꿈과 희망이 있는 서동마을’이라는 잘사는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에 대한 발표로 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 이현종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 담당공무원들이 서동마을 답사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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